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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단가 낮추려 협력사 기술까지 가져간다면…‘상생’은 구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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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시간전
 
〔경제부장 시선의 窓〕
 
기업의 경쟁력은 자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수년간 현장에서 쌓아온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면 하나가 작은 협력업체의 생존을 좌우하기도 한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가 수직적으로 연결된 산업 구조에서 협력사의 기술자료는 단순한 거래 서류가 아니라 기업의 생명줄과 다름없다.
 
그런데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재한 경동나비엔 사건을 들여다보면 우리 산업현장에서 여전히 ‘갑을 관계’가 얼마나 뿌리 깊게 남아 있는지 되묻게 된다.
 
공정위에 따르면 경동나비엔은 난방기기 제조 비용을 줄이기 위해 온도센서 공급업체를 이원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협력업체가 2017년 제출한 온도센서 도면 3종을 활용해 2024년 3월 자체 도면을 작성했다. 이후 한 달 뒤인 4월에는 이 도면을 기존 협력업체의 경쟁사업자에게 제공했다.
 
공정위는 기존 협력업체의 도면과 경동나비엔이 작성한 도면이 매우 유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협력업체가 제공한 기술자료를 활용해 자체 도면을 만들고 이를 경쟁업체에 제공한 행위를 하도급법 위반으로 보고 시정명령과 함께 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단순히 ‘도면을 사용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문제의 출발점이 구매단가 절감이었다는 데 있다.
 
원사업자가 비용을 줄이는 것은 기업 경영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협력업체를 복수로 두는 것도 공급망 안정과 원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정상적인 경영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존 협력업체가 오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개발한 기술자료를 가져다 활용하고, 이를 경쟁업체에 넘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격 경쟁을 통해 공급업체를 바꾸는 것과 협력업체의 기술을 활용해 공급업체를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협력업체 입장에서 기술자료를 제공하지 않고서는 대기업과 거래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대기업의 요구에 따라 제품 도면이나 생산공정, 품질관리 자료 등을 제출하지만, 그 자료가 어디까지 활용될 수 있는지 협력업체가 실질적으로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 이번 사건에서 경동나비엔은 온도센서 공급업체 이원화를 추진했다.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기존 협력업체의 기술자료를 활용해 경쟁업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체 도면을 만들었다면, 그 순간부터 협력업체의 기술은 경쟁력을 지키는 자산이 아니라 거래처를 잃게 만드는 위험 요소로 전락할 수 있다.
 
더구나 공정위 조사에서는 기술자료 요구 과정에서도 문제가 확인됐다. 경동나비엔은 협력업체들에게 관리계획서 등 기술자료를 요구하면서 법에서 정한 기술자료 요구서면을 교부하지 않은 사례 12건이 적발됐고, 교부한 요구서면 10건을 보존하지 않은 사실도 확인됐다. 기술자료를 요구하고 관리하는 기본적인 절차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면 과징금 5억원 이라는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기술을 가진 협력업체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산업 생태계인가’라는 질문이다. 대기업이 협력업체의 기술을 활용해 원가를 낮추고 경쟁업체를 늘리면 단기적으로는 구매비용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협력업체가 기술개발에 투자할 유인이 사라지면 산업 전체의 기술 경쟁력도 약해진다.
 
중소기업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단순히 한 번의 납품 계약을 잃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개발한 기술이 거래 과정에서 노출되고, 그 기술을 기반으로 다른 업체가 시장에 진입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기술개발에 투자한 기업과 이를 활용하는 기업 사이의 경쟁 조건 자체가 달라진다.
 
결국 기술을 가진 기업이 ‘기술을 개발할수록 손해를 본다’고 판단하는 순간 산업 생태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기술 탈취를 엄격하게 감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정위가 이번 사건을 생활가전 분야 직권조사를 통해 적발하고 제재한 것 역시 단순한 개별 기업의 하도급 거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공정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원사업자가 비용 절감이나 거래처 변경 등을 목적으로 협력업체의 기술자료를 부당하게 활용하는 행위를 면밀히 감시 하겠다는 입장이다.
 
기업은 흔히 협력업체를 ‘파트너’라고 부른다. 하지만 파트너라면 상대방의 기술을 보호해야 한다. 거래관계에서 확보한 자료를 상대방의 동의 없이 경쟁업체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이는 것이 과연 상생 경영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 산업계가 글로벌 경쟁력을 이야기하려면 대기업의 실적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실적을 함께 만들어온 수많은 중소 협력업체가 어떤 환경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협력업체의 기술을 보호하지 못하는 산업에서 새로운 기술이 계속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기업이 원가를 절감하는 방법이 협력업체의 기술을 활용하는 데 있다면, 그 순간의 비용 절감은 미래의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비용이 될 수도 있다. 이번 경동나비엔 사건은 그래서 단순한 ‘과징금 5억원’짜리 하도급법 위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거래에서 기술자료는 누구의 것인지, 제공받은 기술을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협력업체의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기업 내부의 통제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산업계 전체가 다시 묻는 계기가 돼야 한다.
 
상생은 협력업체를 부를 때 사용하는 명칭이 아니다. 상대방의 기술과 권리를 존중하고, 그 기술을 빼앗지 않아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거래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짜 상생이다. 납품단가를 낮추기 위해 협력사의 기술까지 활용한다면 그 기업은 당장의 비용을 아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대가는 결국 산업 생태계 전체가 치르게 된다.
 
기술을 보호하지 않는 상생은 상생이 아니며 협력사의 기술을 지켜주지 못하는 산업에는 지속 가능한 경쟁력도 없는 만큼, 이번 사건을 통해 협력업체의 기술자료를 보호하고 대기업의 부당한 기술 유용 행위를 적발·제재해 공정한 하도급 거래 질서 확립과 중소기업의 기술 경쟁력 보호에 나선 공정거래위원회의 발 빠른 대처에 박수를 보낸다.
 
〔mailnews7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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